처음 책을 펼치고 90페이지 가량 읽고 일주일 뒤에 하루만에 나머지 약 150페이지를 읽었는데요. 도대체 어떻게 될까, 싯다르타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걸까 계속 궁금해서 중간에 멈추기 아쉬웠던 것 같아요. 보통 많이 읽어도 보통 100페이지에서 한 번 끊고 가는데, 어제는 왠지 모르게 그냥 계속 읽었습니다..
결국 싯다르타는 남들의 가르침에 불만족하며 본인의 자아를 찾고자 하기도 하고, 깨달음을 얻고자 하기도 하면서 일생을 보내는데요. 싯다르타가 바라고 바라던 깨달음은 누군가가 말로 전해줄 수 없는 것이며, 말로서 꺼내는 순간 그 의미를 잃어버린다고 합니다. 모든 깨우침은 스스로만 할 수 있는 것이며 그 누구도 도움을 줄 수 없다는 이야기예요.
불교의 맛이 강하긴 하지만 힌두교 등 여러 종교의 이야기를 적절히 잘 섞어서 만든 소설이라고 해요.
싯다르타의 자아 찾기 대장정~ 재미있게 읽었고, 다음에 다시 한 번 읽으면 또 다른 느낌이 들 것 같아서 우선 책장 잘 보이는 곳에 꽂아뒀습니다.
젊은 작가가 정말 나이가 젊은 작가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디선가 데뷔한 지 몇 년 이내인 작가를 젊은 작가라고 한다고 봤던 것 같아요. 그래서 신기했는데, 사실 젊다는 건 형용사라서 나이랑 무관한 게 맞는 것 같기도 해요 ㅎㅎ
아찰란 피크닉은 읽으면서 설정이 디지몬이랑 비슷하다~ 했던 부분도 있고 헝거 게임 같은데? 했던 부분도 있고 아무튼 여러 작품이 많이 생각났는데요. 다 재미있는 구석만 따왔다고 생각이 들만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아이들이 상류층만 살 수 있는 헤임에 가기 위해선 일생에 한 번 뿐인 피크닉을 무사히 통과하고, 종평 상위 20명 내에 들어야 한다는 설정에서 이야기가 시작하는데요. 이 아이들이 살고 있는 아찰라는 주거 환경도 열악하고, 한 해의 반 이상은 미세먼지로 흐린 날씨 속에서 언제 괴물인 아찰로 변할 지 모르는 불안감이 도사리고 있는 곳입니다. 이 곳에서 벗어나 더 나은 삶을 위해, 헤임에 가기 위해 종평에 목숨을 걸고 있는 7명의 아이들이 주인공이에요. 각 챕터에서 인물별로 하나하나 소개하면서 마지막 챕터에선 종평의 마지막 점수인 피크닉을 하는 아이들의 이야기로 끝납니다.
읽으면서 재미있었는데, 한 편으로는 너무 우리가 사는 삶이랑 비슷해서 괴롭기도 했습니다.
더이상 사람이 아닌, 털로 뒤덮인 '아찰'이 되지 않기 위해서 이 도시를 벗어나기 위해선 12년 간의 모든 평가 점수를 기반으로 결정되는 종평 상위 20명에 들어야 한다는 게 그냥 대입이나 다를 게 없다고 보입니다.
아이들은 저마다의 고통과 고난을 이유로, 혹은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사는 아이들이라서 더 마음이 쓰이기도 해요. 결국 마지막엔 7명 모두 함께 피크닉을 완주하고, 자기만의 꿈을 찾게 되거나 삶의 방향을 잡게 되는 데 성공해서 다행이라는 마음이 들었어요.
아찰이 된다는 설정 자체도 무서운 건,
마음이 힘든 일이 생겼을 때, 분노했을 때 표출하지 못하고 자기 안에 가둬두면 종양이 생기고, 그 종양이 특정 개수 혹은 크기를 넘어서면 '아찰'이 된다는 점입니다. 그렇다고 본인의 화나 힘듦을 표현하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가 되어서 헤임에서 추방당하기도 하구요. 결국 헤임을 청소하고 관리하는 건 아찰이 하게 된다는 점에서도 넘을 수 없는 신분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여요. 아찰은 관리할 수 있는 방법이 있어 용병으로 써먹기까지 하니 결국 몸을 바쳐 일하던 사람들은 아찰이 되어서도 현실을 벗어날 수 없는 것 같아서 슬펐습니다.
심지어 이 아찰 중에서도 사는 동안에 힘든 일을 많이 겪었던 사람들은 '수라'라는 흉폭한 괴물이 되는데요. 아찰을 이용해 수라를 제압하는 장면도 나옵니다. 사실상 아찰이나 수라는 망가진 사람, 병든 사람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배경은 22세기인데도, 내가 살고 있는 21세기와 크게 다른 부분이 없는 걸 보면
결국 우리도 이렇게 계속해서 경쟁하면서 살다 보면 사람들 간에 더욱 큰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걸 이야기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그리고 결국 그런 미래, 현실에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건 꿈을 꿀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도 함께요.
이 세계관에서는 아이를 낳더라도 키우기 어렵거나, 키운다는 것 자체에 부담이 있는 부모들이 있고
그렇게 방치되거나 버려질 수 있는 아이를 데려다가 키워주는 정부 시설이 있습니다.
그곳에 사는 아이들은 시설에 들어간 월에 따라 이름을 부여받게 되는데요. 주인공인 제누도 마찬가지예요. 그리고 순서 등에 따라 뒤에 숫자가 붙게 되고, 다들 코드네임으로 생활하는 시설이에요. 이 시설에는 최대 17세까지 머물 수 있는데, 그 전에 부모 면접인 페인트를 받아 입양을 가거나, 스스로 사회에 나가게 되는 구조입니다.
제누는 시설의 문제아나 마찬가지인데요. 부모 면접 자체를 거부하거나, 너무 까칠하고 까다롭게 굴어서 시설을 졸업할 나이가 되었는데도 머물고 있는 아이에요. 페인트 최종 단계까지 갔다가도 마지막에 제누는 결국 스스로 살아가기로 하는데요. 이 과정에서 실제로 아이들이 태어난 가정에서 살지 않고, 부모를 직접 선택하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이나 방식, 그 전까지 지내고 배우는 것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당연히 정부 시설이기에 공무원 급의 어른들이 시설을 관리하고, 아이들을 관리하는데 여기 나오는 인물들처럼 책임감을 가지거나 애들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닐 가능성도 있겠고, 정부지원사업이 의례 그렇듯 초반에만 바짝 관리하다 나중엔 방치될 수도 있다는 문제점도 클 것 같습니다. 특히나 초기 도입 시에는 명확한 기준이나 체계도 없을 거고요.
제누가 성장하는 모습과 그 과정에서 관리인들이 겪는 어려움, 그들만의 성장도 재미있지만 오히려 이게 제가 사는 동안은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구조라는 생각을 하게 되어서 더 흥미롭게 봤습니다.
뭔가 이번 책은 이전에 읽었던 것들보다 가벼운 느낌이었어요. 말투도 친구들한테 나 이런일 있었어~ 하고 말하는 투의 느낌이라서 더 술술 쉽게 읽혔던 것 같습니다.
요 표지는 뱀파이어 백작의 마당인 것 같아요. 뱀파이어 백작은 이전에 읽은 보이드 씨의 기묘한 저택에 나온 마라 공작이랑 왠지 비슷한 느낌일 것 같다는 생각을 읽으면서 계속 했습니다.
이 작품의 줄거리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여미새의 작가 살인사건 추리 이야기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레일미어라는 경위의 시선에서 작품이 전개되는데, 프롤로그 에필로그 마저 모두 레일미어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오세이번이라는 나라에서 사랑받는 극작가가 어느날 살해당하고, 그 극작가가 머물던 공간인 조 마르지오 극장을 메인 무대로 극장장과 극장 소속 배우들, 경비원들 등 점점 범위를 넓혀 나가면서 범인을 색출하려고 합니다.
그 와중에 귀족들의 소중한 물건들을 훔쳐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는 괴도 쉐비악도 등장하고, 왕가와 친분이 있는 뱀파이어 백작도 오세이번의 후원자로서 비중있게 등장합니다. 인물이 많긴 하지만 기억못할 만큼 많은 것도 아닌데다가 레일미어랑 머독 경위가 알아서 잘 추리해주기 때문에 저는 흐름을 그대로 읽기만 하면 되는 것 같았어요.
사실 추리 소설을 읽어본 적이 거의 없어서(;;) 재미있게 보기도 했고 친절하다고 느끼기도 했습니다.
외전이 마지막에 있기도 하고 소재가 자극적이기도 해서 가장 기억에 많이 남는데요. 극장의 배우인 듀 세비어를 사랑한 쉬머 자작부인의 자해 사건이 작품에도 몇 번씩 언급돼서 대체 왜 그랬을까 궁금했거든요. 그런데 외전에서 그 비하인드 스토리를 듣게 되어서 다 읽고 책을 덮었을 때 '아 깔끔하다'하는 느낌이 있었어요.
다만 쥬안 양은 어떻게 머독을 좋아하는가? 듀는 러세스를 좋아했나? 하는 2가지 궁금점이 생기긴 했는데 사실상 스토리에 영향을 미칠 정도의 이슈도 아니어서 단순히 어떻게 그랬을까?하는 마음이 드네요.
이전의 두 권이 너무 재미있어서 이 책은 그들만은 못하지만 그래도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게 봤습니다.
동네에 안 가 본 도서관을 구경하러 갔다가 발견해서 한 시간 정도 읽고 뒷내용이 궁금해서 빌려 왔는데요.. 결국 2주 기한을 넘기도록 한 번도 안 읽어서 1주 연장한 마지막 반납 예정일에 나머지를 다 읽었어요.
저는 보통 읽다가 지루해지거나 이게 무슨 소리야 싶은게 있으면 금방 덮어버리는데요. 이상하게 이 작가 책은 너무 궁금해서 거의 하루 이틀만에 다 읽는 것 같아요.
롤랑 가의 유일무이한 7층 (아마도 동네에서 최고층인 것 같습니다.) 빌라의 주인인 보이드 씨가 제목에 있는데요. 보이드 씨에 대한 내용은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이야기 중 묘사하는 내용들도 다 자주 보질 못 한다. 두문불출한다. 하는 이야기니까 말 다했죠. 대신 그 저택의 4층에 사는 라벨 씨가 메인 주인공으로 보여요.
라벨은 다른 사람이 소원을 빌면 무조건 들어줘야 하고, 그 소원을 들어준 대가는 탐미 공작이 가져갑니다. 라벨과 탐미 공작의 관계는 명확히는 모르겠지만 라벨이 어딘가 책잡힌 거겠죠.. 아마도 라벨 아내의 아버지 아닐까 싶네요. 기묘한 스토리가 많긴 한데요 그 중에서도 루이제가 가장 충격적이었습니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오드리 부인 스토리였는데, 라벨과 이미 만난 적 있다는 것도 재미있는 설정이었습니다.
이제와서 보니 십자가 모양의 협곡을 통과하는 황야의 총잡이네요. 오히려 카라보일 수도 있겠네요. 책을 다 읽고 표지를 봤을 때 이 책의 내용이 다시 생각나는 표지가 좋아요. 어쩌면 책의 진정한 마지막 페이지는 표지가 아닐까요?
선교 활동을 떠난 사제 바드레와 라신의 이야기부터 시작하는데요. 라신은 타인을 기도로 치료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있습니다. 본청에서도 이 사실을 알고 있어 바드레를 떠나 보내려할 때 라신은 데려갈 수 없게 하려고 했지만 결국 대부의 자격으로 라신과 함께 그라노스로 떠나게 됩니다. 3가지 시점을 동시에 보여주면서 이야기가 진행되는데요. 첫 번째는 라신, 두 번째는 베르네욜과 그 무리, 세 번째는 테사르입니다. 결국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베르네욜인 것 같아요. 테사르의 아내도 사랑하고, 특별한 능력을 가진 아들을 낳고, 죽었다가도 아들의 능력으로 되살아나니까요.
모호한 느낌으로 결말을 맞이했는데요. 얼음나무 숲과 마찬가지로 이 책도 외전이 있었습니다. 렘이 처음으로 총을 쏜 일을 보여주는데요. 왜 렘의 이야기를 넣었을까 생각해 봤어요. 결국 마지막에 렘과 베르네욜이 살아 남아 같이 지내게 되는데 그 시작이 되는 순간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황야의 무법자! 라는 말이 왠지는 모르겠지만 익숙한데요. 황야의 무법자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와 비슷한 배경, 총을 쏘는 사람들, 서로 죽이는 사람들의 이야기였습니다.
'어린이'라는 단어를 보면 저는 무언가 신나는 느낌, 기분 좋은 느낌이 있었는데요. 이 책을 읽으면서 어린이를 한 명의 사람으로 존중할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어졌습니다.
제가 생각하던 어린이는 마냥 밝고 해맑고 즐거운 게 좋은 아이들이라는 느낌이었는데요. 어린이도 한 명의 사회인으로서 이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됐습니다. 물론 이 저자가 운영하는 독서교실을 다니는 어린이가 대부분이지만, 이 외에도 지금까지 제가 만나본 어린이들도 생각나서 그동안 제가 편협한 생각을 가지고 어린이를 대했던 건 아닌가 싶어지기도 했습니다.
저는 사실은 아닌 척하지만 어린이를 좋아하는 편인데요. 그냥 나보다 어린 아이, 아직 세상에 물들기 전의 사람이라는 느낌으로만 좋아했지 저자처럼 어린이를 하나의 인격체로 대하진 않았다는 걸 다시금 깨닫게 되는 책이었습니다.
가장 좋았던 내용의 일부를 옮길게요.
어른들 사이에도 한쪽은 반말을 쓰고 한쪽은 존댓말을 쓰는 상황이 펼쳐질 때가 있다. 상사와 부하 직원, 시어머니와 며느리, 선배와 후배처럼. 이들의 대화에서 감정을 편하게, 온전히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어느 쪽일까? 반말을 하는 쪽이다. ... 존댓말을 하는 쪽은 자기 감정을 표현하기보다는 상대가 표현한 감정을 알아차리고 대응한다. 인류학자 김현경이 <사람, 장소, 환대>에서 "존비법의 체계는 인간관계가 원활하게 굴러가는 데 필요한 감정 노동을 '아랫사람' 몫으로 떠넘기는 문화와 연결되어 있다"라고 지적한 대로다. 어른들은 흔히 "애들을 위해서 말을 가린다"라고 하는데 어린이야말로 말조심을 한다. 존댓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서열을 파악하고 어휘를 고르고 감정을 조절하는 일이다. 경험은 어른보다 적은데 책임은 어른보다 많이 져야 한다.
그리고 가장 생각을 많이 하게 됐던 문장은 이건데요. 뭔가 엇!! 하는 느낌이 있으면 한 번씩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어린이를 사랑한다고 해서 꼭 어린이를 존중한다고 할 수는 없다.
재미있던 건 어린이는 시야각이 좁아서 우리가 같은 위치에서 봐도 다르게 사물과 세상을 인식한대요. 그래서 아무리 우리가 눈높이를 맞추어 어린이를 이해해보려고 해도 100% 그들의 시야를 볼 수는 없다고 하네요. 결국 어린이를 이해하고, 존중하려면 그들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그들의 세상을 이해해보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 같아요.